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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3 | 213 | 침몰 해역의 바다에는 수백 명의 생존자가 떠 있었다. 스톤헤이븐과 구축함 1척이 접근해 현측에 밧줄을 내렸고, 기름과 파도 속에서 한 명씩 끌어올리는 구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10명째를 끌어올리던 무렵, 견시가 근거리에서 잠망경으로 의심되는 물체를 보고했다. 전날부터 해역으로 전개 중이던 유보트들의 존재는 첩보로 확인된 상태였고, 정지한 순양함은 잠수함 앞에서 표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함장은 해군에서 가장 무거운 종류의 결단을 내렸다. 구조 중단, 즉시 이탈. 밧줄을 붙든 채 끌려가다 떨어져 나가는 생존자들을 뒤로하고 스톤헤이븐은 속력을 올렸다. 바다에 남겨진 이들 중 이후 독일 측 함정과 기상관측선이 추가로 건져낸 것은 5명뿐이었다. 보탄의 승조원 2,200여 명 중 최종 생존자는 115명. 리퍼블릭의 1,419명 위에 이번에는 2,000명이 얹힌 것이다. 구조 중단의 결정은 전후까지 논쟁거리로 남았으나, 리퍼블릭의 생존자가 3명이었던 전쟁에서 그 함장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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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5 | 215 | 소식이 전해진 그날, 루이나 의회는 회기를 중단하고 베렌하르트의 전문 전문(全文)을 낭독했다. "1941년 5월 27일 10시 39분, 함대는 약속을 지켰다." 사흘 전 "귀항하지 않는다"던 그 전문의 대구였다. 거리에는 호외가 뿌려졌고, 리퍼블릭 승조원 유족들이 항구에 모여 바다를 향해 헌화하는 사진이 이튿날 모든 신문의 1면을 채웠다. 그러나 축포의 이면에서 해군 수뇌부의 결산은 훨씬 건조했다. 최신예 전함 하나를 잡기 위해 동원된 것은 주력함 7척과 항모 2척, 순양함과 구축함 수십 척, 그리고 나흘의 시간이었다. 그 나흘 동안 호위를 뜯긴 선단들이 대서양 곳곳에서 무방비로 항해했다는 사실, 그리고 결정타가 전함의 주포가 아니라 시속 130km 복엽기의 어뢰 한 발이었다는 사실은 각기 다른 방향의 교훈을 남겼다. 어쨌든 하나의 시대가 이날 끝났다. 독일의 대형 수상함이 호위 없이 대양을 활보하던 시대, 그리고 '위치 불명의 전함'이라는 세 글자가 루이나를 마비시키던 시대였다. 다만 그 관에 마지막 못이 박히기까지는, 아직 반년의 소모전이 남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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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6 | | === 뤼첸스의 최후 (1941년 5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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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7 | 217 | === 잔존 함대의 항구 봉쇄와 항공 소모전 (1941년 6월~8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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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8 | 218 | === 중순양함대의 마지막 출격 (1941년 9월~10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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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9 | 219 | === 랜드 내해 북부 해전과 종결 (1941년 11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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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1 | 221 | ==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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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3 | 223 | == 영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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